- 창작무협. 무림독패(武林獨覇)
- 37 - 회자정리(會者定離)
곤륜파는 최근 비밀리에 당금 황제의 아들이라는 태자까지 북경으로 호송에 나서는 등 조용하기만 하던 곤륜파에서는 고진 일행이 찾아들면서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곤륜파 제자들은 평소에도 그들이 묵고 있는 별부(別府)엔 잘 드나들지 않았다.
더우기 그들이 그곳에 묵은 뒤부터는 더더욱 얼씬거릴수가 없었다. 괜스리 어슬렁거리다 삼부인에게 걸리면 그날로 삼복더위에 개잡는 소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대부인인 채미란은 출산일을 50일 가량 남겨두고 있어 요즘 거의 거동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는 대부인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이 있기에 모두가 그녀의 말을 따랐다. 심지어는 남편인 고진조차도 그녀의 말에 십분 따르고 있는 처지였다.
삼부인인 청소옥은 요즘들어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이유는 그녀도 임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부인인 유청화, 사부인인 강유정, 오부인인 제갈여의. 이들 모두가 학문에 대해서라면 모르는게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재녀들이 아니던가.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체력이 약해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 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곤륜파에 와서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당한 소질을 보이고 있어 그들을 가르치는 유호청도 여간 싱글벙글이 아니었다.
막내 육부인인 소홍은 고진에게 의술을 전수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특히 외상과 조제술(調劑術)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칼로 상처부위를 찢고 꿰메고 하는 일은 웬간한 사내들도 하기 힘든 일인데 그녀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처를 절개하곤 했다.
또한 한 번 듣고 배운 약초들의 배합또한 훌륭하게 소화해내니 그녀를 가르치는 고진조차도 혀를 내두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별부루(別府樓).
홍무연과 유호청이 장기를 두고 있었고, 그 가운데 고진이 무심한 표정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별부루엔 그들 세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 놈아,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게냐? 얼굴이 어두워.......]
홍무연이 고진에게 물었다.
여섯명의 절세 미녀들을 아내로 거니리고 있는 천하제일신의 고진....... 모든 세인들이 부러워하다못해 존경까지 아끼지 않는 그에게도 말못한 고민이 있단 말인가?
유호청도 장기판을 주시한체 묻는다.
[사위,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데....... 무슨 고민인가? 옛 성현의 말씀 중에 고민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네.......]
[네 놈도 제법 문자를 쓸 줄 아는구나? 킥킥킥.......]
[흐흠......! 홍사숙, 나도 옛날엔 잘 나갔다오.]
[쿠쿡......!]
순간, 고진도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그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을 끄집어 냈다.
[저의 몸은 하나인데 잠자리를 여섯군데서 오라하니 저도 어찌할바를 모르겠습니다.]
[뭐? 크......, 크하하하하하하......!!]
두 명의 노인들은 장기판이 엎어지는 줄도 모르고 배를 부여잡고 웃어 젖히고 있었다. 얼마나 웃었던지 그들의 눈가엔 눈물이 성글성글 맺혀져 있었다.
[이 놈아! 그것도 고민이라고 하고 있는게냐?]
홍무연이 고진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무릇, 계집들이란 길들이기 나름이야! 벌써부터 네 놈이 끌려다니면 어쩌겠다는거야?]
[흠, 그건 홍사숙의 말이 맞소.]
[네 녀석은 좀 빠져!]
홍무연은 유호청에게 윽박을 주며 말을 짤랐다.
[사내녀석이 기껏 여섯명 밖에 안되는 마누라도 못 다스려서야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
[기껏 여섯명이라고 하셨소? 아니, 그럼 홍사숙은 그렇게라도 거느려 보셨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려?]
[내가 이 나이에 일일이 그걸 다 보고해야 하느냐? 나도 30년전에는 잘 나가는 거지였단 말이다.]
[크큭.......]
[푸후후......!]
[아니, 호청이 네 놈도 내 말을 못믿는단 게냐?]
[아니, 아니오. 나는 홍사숙의 말을 믿소.]
유호청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날 저녁.
여섯명의 부인들과 식사를 끝낸 후 한 자리에 모여 중대한 회의(?)가 시작 되었다. 물론 주최자는 고진이었다.
[미란, 몸은 좀 어떻소?]
[괜찮아요, 소홍이 신경을 많이 써줘서 오히려 몸이 둔해질 정도에요.]
[후훗, 그 정도면 괜찮구려. 소옥은 요즘 음식 가리지 않고 잘 먹지?]
[잘 먹고 있다 못해 뚱뚱해질 판이라구요! 정말 끔찍해.......]
청소옥은 몸을 부르르 떨며 뚱뚱해질 자신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러자 나머지 부인들은 조용히 웃음을 나누었다.
[유정과 여의는 요즘 무엇을 배우고 있소?]
[유정 언니와 저는 요즘 곤륜파의 내공심법을 배우고 있어요.]
제갈여의가 강유정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데도 서열에 익숙해졌는지 그녀를 언니라 칭해주었다.
[그럼 청화는?]
[저는 상공이 가르쳐준 내공을 연마하고 있어요.]
[내가 가르쳐준......? 내 기억으론 전수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유청화는 그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붉게 변해버렸다. 이미 결혼을 한지 반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부끄러워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청초한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상공이 예전에 소녀의 병을 치료해 주실 때....... 가르쳐 주신.......]
그녀도 말을 다하지 못했다.
[그랬었구려.......]
고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곤 모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의 잠자리 때문에 모이라 했소.]
채미란이 그의 말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들이 별부의 방을 많이 쓰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갖고 누가 흉보진 않을텐데요?]
[맞소. 하지만 솔직히 내겐 부담이 되는 일이오.]
그의 말에 유청화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만다. 필경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청화, 이건 그대의 생각처럼 그런 문제가 아니니 심려치 마시오.]
그는 세심하게 부인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우리들은 큰 방 하나면 족할 것 같은데....... 부인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럼, 그 방 하나에 우리 여섯명이 모두 잔단 말이에요?]
청소옥이 물었다.
[그렇지.......]
여섯명의 부인들은 일순 홍당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저마다 홍조를 띄우며 자신의 표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몰라했다.
[상공, 꼭 그렇게 하고 싶으신가요?]
제갈여의의 질문이었다.
[굳이 강요하는 것은 아니오. 그럼, 잘 생각들 해보시고 결정하시오. 미란이 내게 결과를 알려 주시오. 난 잠시 후원에 나가 있겠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나자마자, 청소옥이 버럭 소리쳤다.
[큰 언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아무래도 상공의 바람기가 다시 도지려는가봐?]
[네에?]
채미란의 말에 다섯명의 부인들은 일시에 합창하듯 놀라했다.
[그건 안돼요!]
[절대로 안되는 일이에요!]
[그럼 어떻게 한다? 나나 소옥은 다른방에 자도 상공이 뭐라하지 않겠지만 나머진 어떻게 할거야?]
[어차피 자는 거라면....... 그것도 괜찮겠죠.]
소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으로 나왔고, 유청화는 끌려가듯 수가 많은 쪽으로 넘어질 기세였다. 그리고 제갈여의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들의 뜻을 잘 알았으니, 상공께 알려줘야겠군.]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후원으로 나왔다.
고진이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서성이고 있었다.
[상공.......]
[아, 미란.......]
채미란이 남편의 등에 겉옷을 걸쳐주며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당신도 이럴 때 보면 아주 얄궂어요.]
[내가 좀 심했나보군. 하지만 얹혀서 머무는 입장에서 솔직히 많은 방을 쓴다는게 유대형께 괜스리 미안하더군.]
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건냈다.
[알아요....... 날씨가 차가와요. 어서 들어가요.]
[응.......]
그는 채미란을 한팔로 껴안으며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후원에는 어느새 새하얀 눈이 나부끼고 있었다.
소리없이 쏟아져 내리는 굵은 함박눈은 금새 세상을 흰색으로 덮어 버리고 말았다. 은빛의 정원을 꾸며 놓아버렸다.
그날 밤, 별부 한쪽 방에서는 여인들의 그칠줄 모르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었다. 무슨 일이 있어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지는 당사자들이 아니더라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x x x
이튿날,
아침 나절에 고진의 외숙부인 용천우가 찾아왔다.
[진아, 나와 함께 청해도로 가지 않겠느냐?]
[청해도......?]
[그래, 네 어머니의 고향 말이다. 가지 않겠느냐?]
[가야죠!]
고진의 딱부러지는 말에 용천우는 느긋한 웃음을 띄웠다.
[헌데, 외숙부....... 저는 권력다툼에 끼어 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진의 이 말에 용천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세력다툼에 끼어들어 들다니? 그건 또 무슨 뜻이냐?]
[어머니는 중원으로 수라진경이라는 비급을 찾아 중원까지 오셨습니다. 그 문제는 필시 수라진경이 청해도에 매우 중대한 비급이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도 위험을 감수하며 그것을 손에 넣었을 것입니다.]
[.......]
용천우는 고진의 말에 잠시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 사실, 수라진경으로 우리 청해도는 다른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었다. 헌데, 중원에서 찾아든 이방인으로 인해 수라진경이 도난을 당하고 우리 청해도는 곧이어 심각한 위기에 처해졌지.]
[.......]
[도난당한 수라진경을 악용하는 자가 나타나면 대륙전체가 피의 혈겁에 휘몰리게 되는 것을 잘 아는 네 외조부는 그 사태를 막기위해 청해도의 일급무사 12명을 중원으로 파견했지만 한명도 돌아오지 않았지. 그러다가 결국엔 네 어머니가 수라진경보다 한단계 낮은 옥수혈경을 익혀 중원으로 스스로 떠났지. 비록 수라진경을 찾았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할 객이 되었으니.......]
고진은 외숙부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찹찹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외숙부....... 저는 수라혈신이니 수라혈공이니 하는 무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게다가 수라진경을 되찾았으니 청해도의 문제는 외숙부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흠.......]
용천우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네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너는 구원신의라 불리우는 의원이니 이곳에서도 할 일이 많겠지....... 그래, 잘 알겠다.]
[외숙부님.......]
[나는 3일 후에 떠날 것이다. 너도 준비를 해 두거라.]
[알겠습니다.]
x x x
[아니, 3일후에 떠나기로 했다구요? 미쳤어요?]
청소옥의 날카롭고 화난 음성이 터져나왔다.
[청매는 목소리를 낮춰.......]
채미란이 청소옥을 타이르며 얘기를 했다.
[큰 언니, 언니는 2달만 있으면 애기를 낳을 몸인데 그 몸으로 여행이라니 그게 말이 돼요?]
[그건 청 언니의 말이 맞아요!]
강유정과 소홍의 말이었다.
[상공, 이번에 하신 결정은 좀 경솔하신 것 같아요.......]
유청화의 말이었다.
[.......]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쩔수 없어. 그 분은 이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야. 그 분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어.]
[.......]
[상공, 이 문제는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유청화가 조용조용히 얘기를 건냈다.
[당신들이 떠나지 않겠다 하더라도 나는 외숙부와 함께 떠날 것이오.]
그는 그의 결심을 밝히고는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방안의 분위기는 푹 가라앉은 적막한 상황이었다.
[오매(五妹).......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던 제갈여의가 채미란의 질문을 받고는 대답을 했다.
[큰 언니, 제 생각에는 상공의 뜻을 따라야 할 것 같아요. 상공은 결코 가볍게 생각하고 행동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언니들이 모르진 않을테죠? 그분이 하신 결정이라면 저희들은 말없이 따라야죠.......]
[어휴......, 만상제일뇌라 일컫는 오매도 어쩔 수 없군.]
청소옥이 답답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채미란은 말없이 깊은 고심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그날밤은 조용히 저물어져만 갔다.
x x x
3일후,
용천우부부와 고진부부는 곤륜파를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호청과 장만보는 그들을 보내기가 매우 아쉬운 듯이 바라보았다.
[정녕 이렇게 떠나야하는가?]
[유장문께서 편히 대해주셔서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와 진아와 질부들을 고향으로 안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에 서둘러 떠나는 걸 용서하십시오.]
[그래도 몹시 아쉽구만.......]
[아버님......, 잘 다녀올께요.]
[흠....... 사위, 아무쪼록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라네.......]
[잘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이 녀석아, 네 놈의 사위가 가는 것은 아쉽고, 내가 가는 것은 시원하다는게냐?]
[이런, 홍사숙께는 어제 섭섭치 않게 대접해 드리지 않아소?]
[그깟 백팔화미향주 20단지로?]
[참나, 백팔화미향주 1단지를 담그려면 무려 1년이 넘게 걸린단 말이오. 그걸 몽땅 다 먹어치워 놓고선.......]
[쳇, 그깟 술 20단지로 생색을 내다니....... 네 놈도 이제보니 속좁은 놈이구나!]
[거참....... 홍사숙도 몸조리 잘하시고 건강히 돌아오시오.]
[빌어먹을......! 꼭 죽어서 오라는 얘기처럼 들리잖아!]
[아무래도 사위한테 귀를 진찰을 받아 보셔야겠소!]
[뭐야?]
[하하하하! 두 분께선 그만들 다투시오. 떠나는 사람들도 생각해 봐야지 않겠소?]
장만보가 곁에서 끼어들면서 두 사람을 말렸다.
[그래, 조금이라도 나이 더 먹은 내가 참아야지.......]
용천우와 초홍이 작은 마차에 먼저 올랐고, 그 뒷마차에 채미란과 그녀의 어머니 채예상과 제갈여의가 함께 탔다. 마차는 백선과 흑선이 몰았다.
그 다음마차에 유청화를 비롯한 나머지 부인들이 탔다.
마부는 여전히 궁중마부 주노였다.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몸 건강히 계십시오.]
[음.......]
고진이 주노 옆에 올라타자, 주노는 깜짝 놀라한다.
[주인어른, 왜 이 자리에......?]
[주노, 그대는 하인이 아니오. 앞으로 내게 주인이라는 호칭은 절대 쓰지마시오. 나를 부르기 뭐하면 고의원이라 불러 주시오. 아시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출발 하시오.]
[알겠습니다. 이럇!]
주노는 말을 몰랐고 황금사두마차가 황금빛을 띠며 마차행열에 마지막을 장식했다.
멀어져만 가는 마차들을 바라보고 있던 유호청과 장만보는 갑자기 곤륜산이 조용해진 것을 느낀 것인지 허탈한 표정이었다.
[너무나 썰렁하다는 느낌이 드는군.]
[유대형,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이제서야 실감하게 되는군요.]
[훗....... 그러게 말이야. 자, 우리도 이만 들어가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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