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무협. 무림독패(武林獨覇)
- 32 - 만상제일뇌(萬象第一腦) 제갈여의(諸葛如意)
중양절이 지난지도 벌써 10일이었다.
그동안 용천우와 고진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용천우는 굳이 싫다고 하는 고진에게 검법과 권각술을 전수해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진의 실력은 용천우를 실로 놀라게 만들었다.
고진의 능력은 마치 밑빠진 물을 들어 붓는 것 처럼 한정없이 그의 무공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숙부, 이 비급을 보시지요.......]
고진은 자신의 품에서 한권의 비급을 꺼내어 주는 것이었다.
용천우는 무심결에 그 책을 받아 펼쳐 보았다.
순간, 그의 인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아, 이 책을 어디에서 발견했느냐?]
그러자 고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어머님이 생전에 갖고 계셨던 책입니다.]
[오오......! 이것은 우리 청해도의 잃어버린 비급이니라.]
그는 그 책을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숙부.......]
고진은 그 책에 얽힌 얘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용천우가 오열을 토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x x x
무력 296년. 시월(十月) 스물이레(二十七日).
용천우의 부인인 초홍이 산통(産痛)을 호소하며 울부짖었다.
[아악!]
강유정은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쩔줄을 몰라했다.
남편과 숙부인 용천우는 무공을 배운답시고 산속에 처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럴 때 언니이라도 있었으면.......]
청소옥은 아침일찍 물건 살게 있다고 마을로 내려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강유정은 더더욱 안절부절해하며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때, 용부인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물을....... 물을 끓여요! 어서......!]
강유정은 그녀의 음성이 들리자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하며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아이가....... 아이가 나오려고 해! 어서......! 어서 아이를......!]
초홍의 울부짖음은 간간히 들려왔었다. 사력을 다해 내 뱉는 것 같았다.
강유정은 땀에 흠뻑 젖은 초홍의 얼굴을 보자 사뭇 긴장되었다.
[아이를 받아줘.......]
강유정은 얼떨결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다리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끈끈한 액체와 함께 미끈한 막에 싸여진 하나의 물체가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서도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아이의 머리가 잡혔다.
[끌어내......! 아아악!!]
초홍은 한마디의 말이 새어 나올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강유정은 아이를 천천히 끌어 당겼다. 그녀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음에도 차분하게 아이를 받아내고 있었다.
[으아아앙......! 아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초홍과 강유정의 얼굴엔 함박 웃음꽃이 피어났다.
x x x
형가촌 뒷편에 있는 동혈(洞穴).
용천우의 머리위로 붉은 서기(瑞氣)가 피어 올랐다.
<쿠르르...... 파아아앙!>
문득, 용천우의 눈빛이 번뜩이며 떠지더니 눈 앞에 보이는 바위를 순식간에 박살내어 버리는 것이었다.
[으하하하! 드디어 팔성의 수라혈공(修羅血功) 이루었다! 이대로가면 올해 안으로 수라혈신(修羅血身)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크하하하!!]]
용천우는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곁에 앉아 있는 고진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오......! 칠색서기(七色瑞氣)가 전신을 휘감고 있다니......! 혈공의 완성단계인 십이성의 경지......?!]
각양각색의 희뿌연 연기들이 고진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진은 이미 무아의 지경에 빠져든 것 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였다.
[진아의 성취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누님은 실로 대단한 아들을 남기셨소......!]
용천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동혈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반각이 지났을 무렴.......
고진의 몸에서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뚜두둑! 뚝!>
그의 신체가 울룩불룩하게 변하더니 여기저기에서 뼈마디가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의 살갗이 엷은 빛으로 점점 변해갔다.
이윽고 희뿌연 연기는 완전히 고진을 가두어 버렸다.
<푸스스스......!>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옴에도 그 희뿌연 연기는 전혀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어시진이 지났을까?
고진은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허나 그의 모습을 보라.......
그가 걸치고 있던 의복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저토록 볼상 사나운 모습으로 앉아 있는가? 또한 그의 몸이 언제 저렇게도 탄탄하고 건장했던가? 문약하게만 보이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수도 없었다.
탈태환골(脫胎換骨).......
어디 탈태환골 뿐이랴? 가공스러운 마공이라고 불려지는 수라혈공을 완벽하게 익힌 수라혈신의 경지까지 이루었으니 어디 세인들이 부러워할 것이 한 두가지인가?
허나, 기절초풍할 일이 또 하나 있었으니.......
강호무림에 전해지는 전설.......
<수라혈신의 무공을 지닌 자, 패도무겁륜을 익힌다면 그는 능히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절대지존(絶對至尊)이 되리라.>
그는 과거 사부인 살인귀의 곡양풍으로부터 내공을 전수받았는데, 바로< 천령혼침술>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것은 마교의 절대마공인< 패도무겁륜>에다가 곡양풍이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사부의 유지(遺志)에 따라 그것을 십이성 완성하지 않았던가.
거기에다 10여년동안 어머니로부터 혹독하게 전수받은< 수라혈경>의 내공심법이 있었으니...... 수라진경의 무공을 십이성 완벽하게 소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전설.......
그것은 결코 전설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안배된 과정속에서...... 절대무림지존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 졌다.
고진은 서서히 눈을 떴다.
[개운하다.......]
그가 나직히 중얼거림과 동시에 눈을 번쩍 떠보니 컴컴하기만 한 동굴에 어찌된 일인지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밝지 않은가.
[응?]
고진은 순간,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벌거벗은 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발아래엔 희뿌연 먼지들이 자욱했다.
헌데도 그의 몸엔 한홀의 티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꼴이람?]
고진은 자신에게 변화가 생긴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용천우를 찾았다.
헌데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엔 한권의 낡은 책만이 휑그러니 남아 있었다.
[사숙은 어디로가고 이 책만......?]
고진은 그 책을 펴 보았다.
모두가 검법들로 가득한 책들이었는데 한결같이 방어로 이루어진 검법들이었다.
[흠, 이걸 익히면 사람을 공격하지도 않고 좋을 것 같구나.]
고진은 그리 중얼거리며 그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두 번째 책을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 용천우가 먹을 것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동굴에 들어서서 고진을 보자 깜짝 놀랐다.
[진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외숙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눈을 떠 보니 이런 꼴로 있지 않겠어요? 뭘 자꾸 보세요?]
용천우는 겉옷을 벗어 고진에게 건네 주었다.
고진은 그의 겉옷을 허리에 두르니 마치 여인네들이 치마를 두른 것 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 무얼 보고 있느냐?]
고진은 그의 말에 책을 덮고 그에게 건네 주었다.
[이건......?]
그는 그의 품속에 있어야 할 것이 고진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 책은 숙부의 것이 아니었나요?]
[음.......]
그는 그 책을 얻게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자 고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죠? 난 그 책이 숙부의 것인줄 알고 보았으니.......]
[허허....... 단지 본다고 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가 산에 들어 온지도 벌써 한달이 훨씬 지났구나.]
[그러게요.......]
용천우는 고진에게서 받은 책을 품속에 갈무리를 한 다음 다시 가슴을 두들겨 확인을 했다.
[이제 우리들도 성취를 이루었으니 그만 하산토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고진은 용천우가 갖고온 과일들을 먹은 후, 그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밖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술시(戌時;19∼21시)가 다 되어서야 마을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어귀앞에서는 등불을 들고 서성이는 하나의 인형이 있었는데 돌연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상공!]
고진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강유정임을 알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황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여유있게 말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매우 가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그렇게 느긋하게 걸어오실때가 아니에요!]
[작은질부, 무슨 일이 있느냐?]
용천우가 물었다.
[숙모님이 아이를 낳았단 말이에요!]
[뭐엇? 초홍이 아이를......?!]
용천우는 더 이상 강유정의 말은 듣지 않고 집으로 뛰쳐 들어갔다.
[아이를 낳았으면 경사스러운 일일텐데 왜 그리 호들갑스러운거야?]
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강유정도 속이 타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에요! 아이가 이상하단 말이에요!]
[아이가......?]
고진도 그제서야 강유정이 왜이렇게 호들갑스러운지 알게되었다. 그의 표정도 장난기가 가시고 진지하게 변했다.
[네....... 얘기의 몸에 열이 불덩이 같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침을 흘리고 있어요. 청언니가 맥을 짚어봤는데 도무지 짚을 수가 없대요!]
고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먼저 갈테니 뒤 따라 와!]
순식간에 집에 도착하여 보니 화기애애하며 즐거워해야할 분위기가 마치 초상치를 분위기가 아닌가. 그가 방으로 들어가니, 청소옥이 마치 구원의 빛이라도 본 듯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왜 이제서야 오는거야......? 어서...... 아이를......!]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초홍의 얼굴또한 피로와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고진은 초홍의 옆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본시 갓난아기의 진맥이 가장 어려워. 옛부터 말하길 열 사람의 남자를 치료하기는 편할지라도 한 부인을 치료하기는 어렵고, 열 사람의 부인을 치료하기는 편할지라도 한 어린아이를 치료하기는 어렵다고 했지. 왜냐하면 어린아이에게 증세를 물어 볼수도 없고 맥을 살필수도 없기 때문이지.]
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소옥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애절한 절규처럼.......
[하지만, 당신은 중원제일신의라 불리는 사람이잖아요!]
[중원제일신의......?!!]
문득 용천우와 초홍의 사색된 얼굴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말, 진아 네가....... 네가 진정 중원제일신의란 말이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우선.......]
그는 아이를 초홍의 품에서 받아냈다. 그리곤 급히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게 만들어 그 아이에게 먹였다.
아이는 그 피를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경기(驚氣)를 일으키며 삼킨 피를 토(吐)해 내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다음 아이의 목에 시퍼렇게 일어선 핏줄에 대고 진맥을 했다. 본디 진맥은 손목에서 많이 측정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인체의 피가 전신을 한바퀴 돌 때 그 중간 지점이 바로 완맥(腕脈) 부근이기 때문이다.
[풍(風)......?]
풍은 곧 간(肝)이 나쁨을 의미한다.
간이 나쁘다는 것은 곧 무언가에 아이가 심하게 놀랐다는 뜻이다.
곧잘 무언가에 놀라면<간 떨어질뻔 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이 이에 통용되는 말인 것이다.
나이가 든 성인들은 왠만한 소리에 놀라는 시늉은 하지만 풍으로 도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어린아이일수록 작은소리에도 민감하게 놀라 큰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 그것도 갓태어난 아이가 이렇듯 놀랐다는 것은 분명 급경풍(急驚風)에 걸린 것이리라. 도대체 무엇에 놀라 이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고진은 아이의 아랫배에 손을 얻고 내공을 주입시켰다. 그의 내공은 얼마전의 수련으로 과거의 수십배가 증강되어 있었던 것임을 그는 알지 못했었다.
그는 아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임에도 희멀건 물을 배설하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휴우.......]
그는 다시금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아이의 목구멍으로 집어 넣었다. 아이는 조금전 처럼 토사(吐瀉)도 하지 않고 표정도 백치가 된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평온스럽게 잠을 자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초홍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용천우도 고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청매(靑妹),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
청소옥은 고진의 말에 고개를 푸욱 숙인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초홍도 그런 청소옥을 보고는 말했다.
[아기도 완쾌되었으니 너무 심려치 말아요.......]
[흐흑......!!]
청소옥은 돌연 울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뛰쳐 나갔고 고진은 황망히 나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초홍이 그를 보며 말하다 돌연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림새.......
웃통은 훌러덩 벗어 젖혀있었고 바지라고 휘두른 것에는 볼상사나운 사내가 직시(直視)되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른 몸을 돌렸다.
[앗......!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방안에 있는 여분의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달빛 한쪽 귀퉁이에선 청소옥이 여전히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는데 강유정이 다가가 그녀를 달래어 주고 있었다.
[소옥.......]
고진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자 청소옥은 그의 품에 안겨 더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아기가 태어난 줄도 모르고 황매와 숙모님을 놀려줄려고 장난을 쳤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 때문에......, 흐흑......!! 나 때문에......!!]
그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젠 괜찮아. 정말 아무일도 없어.......]
청소옥이 얼마나 울었을까?
그녀는 훌쩍 훌쩍거리며 고진의 몸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상공.......]
강유정의 얼굴도 붉으스름하니 변하며 고개가 반쯤 돌아가 버렸다.
[앗......!]
청소옥이 그의 몸에서 떨어질 때 그의 하나 남은 천조각마저 가져가 버렸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고진은 쑥스러운 듯이 몸을 움츠렸다.
[아니, 당신......!! 정말 못 말릴 사내로군요!]
청소옥의 갑작스런 행동에 고진은 황급히 몸을 날려 사라졌다.
[하하......, 이건 절대로 내 뜻이 아니었어.......]
[흥! 그래도 부끄러운줄은 아는 모양이군!]
강유정은 조금전까지만해도 징징거리던 청소옥이 어느새 예전의 성격대로 돌아온 것에 멍하니 웃음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일이 지난 후,
용천우와 고진은 곤륜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짐의 길을 걸었다.
사실 그들이 이곳에서 지체한 시간도 두어달이나 훨씬 지났기 때문이었다. 용천우와 초홍을 태운 마차는 북동쪽으로 멀어져갔고, 고진부부는 서북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은 무척이나 헤어지기가 싫었으나 각기 해야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이별을 갖았던 것이었다.
x x x
11월이 되자 날씨가 무척이나 쌀쌀하게 변해 버렸다.
입동(立冬)이 지나서 그런가? 보이는 사람들 족족히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곧 경성입니다. 아가씨!]
악양을 떠난 지도 벌써 두어달이 되서야 경성에 도착한 채미란일행이었다.
그녀 혼자서 왔다면 열흘안에 도착했을 거리임에도 이렇게 시간을 지체한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어머니 채예상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상에 나온지도 근 30여년만이었기 때문에 가는 곳곳마다 유람을 하며 즐기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지게 되었다.
그런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본의 아니게 호강을 한 사람은 다름아닌 늙은거지 홍무연이었다. 그는 가는 곳곳에서 술이란 술은 마셔보지 않은게 없을 정도로 술독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흑선이 끄는 마차는 곧장 입구로 접어 들었다.
순간, 그들의 마차 앞에 두 명의 관병이 마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잠시 멈추시오!]
흑선이 말 고삐를 잡아 당기며 마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시오?]
그러자 관명이 다짜고짜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려고 했다.
[잠시 마차좀 검사 하겠소!]
[무슨 일이냐?]
채미란이 모습을 드러내며 흑선에게 물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명의 관병이 마차안을 휘익하니 둘러보더니 이내 문을 닫는 것이었다.
[협조해 주셔서 고밥소! 어서 가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것이오?]
[우리는 10세가량의 젊은 사내아이를 찾고 있소! 그대들은 됐으니 어서 통과하시오!]
흑선은 다시 마차를 몰아 시내로 흘러 들어갔다.
관병들은 뒤에 오는 마차도 여차없이 검색하였고, 어린아이를 보면 하나의 초상화와 대조해 보며 통과시켰다.
도대체 관병들이 무엇 때문에 어린 사내아이를 찾아 다니는 것일까?
x x x
무당파.
소동 청양이 여느날과 다름없이 빗자루를 들고 계단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입동이 지났음에도 낙엽이 뒤돌아서면 쌓이고 또 쌓였다.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구나.......]
청양은 빗질을 하다가 돌연 한숨을 쉬며 잠시 쉬는 사이에도 바람에 날려든 낙엽은 또다시 계단을 어지럽혔다.
[에구....... 정말 이러다간 온종일 쓸어도 끝이 없겠구나.......]
청양은 털썩 계단에 주저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이녀석, 또 게으름을 피우고 있구나!]
돌연한 음성에 깜짝 놀라며 얼른 빗자루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청수 대사형.......]
그는 몇 달전 자신의 눈앞에 초라한 거지로 나타난 적이 있었던 무당파의 큰 제자였다.
청양은 한손을 올리며 인사를 했다.
[대사형,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시전(市廛)에 물건 사러 가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말꼬릴 흐렸다. 그러면서 빗자루를 들고 있는 청양을 곁눈질로 살폈다. 청양은 한 번도 시전에 갔다와본적이 없기 때문에 몹시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같이 갈까?]
청수가 물었다.
청양은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네!]
[그럼, 가자!]
청양은 빗자루를 한 곳에 두고 청수를 따라 나섰다.
x x x
무당산 아래에 있는 시장.
청수와 청양은 돌아다니며 쌀과 약재들과 갖가지 생필품들을 샀다.
[할머니, 이건 뭐하는 물건이에요?]
청양은 시장 한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건을 파는 노파(老婆)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노파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물건이다!]
청양은 딱딱하게 말하는 노파의 대답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쳇, 이런 거무틱틱하고 보잘 것 없는 물건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자, 노파는 버럭 호통을 쳤다.
[헛소리! 감히 네가 이 신선호철각패(神仙蝴綴角牌)에 담긴 깊은 뜻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신선호철각패?]
청양은 처음 듣는 말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원의 눈길로 대사형 청수를 바라다 보았다.
[할머니, 그게 정말 신선호철각패가 맞긴 맞는겁니까?]
[아니, 젊은 놈들이 맨날 속고만 살았나? 웬 의심이 그렇게 많아?!]
[제가 알기론 신선호철각패는 3백년전의 물건인데....... 그게 어떻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요?]
[흥! 물건 볼 줄 모르는 놈들하곤 상관하기 싫다!]
노파는 콧바람을 일으키며 고개를 싹 돌렸다.
그때였다.
[할머니....... 이건 전설의 신선호철각패가 아닌가요?]
이제 12살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노파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행색을 보니 너덜너덜한 넝마를 겨우겨우 줏어 입은 듯한 옷차림새에 며칠은 세수를 못해서인지 얼굴에 숯칠을 했는지 시커멓고 손과 발은 시퍼렇게 부르터 있었다. 허나 그의 말투와 풍기는 태도는 가히 명문대가의 자손들 못지 않았다.
[너는 신선호철각패가 뭔지 알기나 아는 것이냐?]
그러자 그 거지소년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신선호철각패는 3백년전 무림에서도 쟁쟁한 신화를 남긴< 신선궁>의 영패였죠. 하지만, 그들의 독보를 두려워한 무림인들은 신선궁을 중원에서 쫓아내는 바람에 사라지고야 말았죠. 그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이런 얘기가 전해졌죠.< 신성궁이 영패를 소유하고 있는 자, 중원 무림의 초절한 무학들을 꺾을 수 있는 신성궁의 독보절학(獨步絶學)을 익힐 수 있다.>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에요. 헌데 이상한 것은 신성궁의 사라짐과 동시에 황금성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다는 거에요.]
듣고만 있던 청수와 청양의 귀마저 솔깃해졌다.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그들은 어느듯 빠져들고 있었다.
거지소년의 입은 계속 열려지고 있었다.
[무림삼대기보라고 소문난 무궁도, 유패검, 옥령환과 연결된 것이 바로 황금성에 관한 전설이죠. 헌데 저의 사부님 말씀은 그 황금성은 신성궁과 관계가 있다고 했어요.]
노파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지소년에게 물었다.
[네 사부의 이름은 무엇이냐?]
[안돼요! 사부님은 절대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알리지 말라 하셨어요!]
[흐음......!]
노파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있었다.
[할머니....... 그거 안 파실거에요?]
[얼마에 살 것이냐?]
[사부님은 황금 10관을 주라고 했어요!]
청수와 청양은 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황금 10관?!!]
황금 10관이면 한 성(省)을 사고도 호위호식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돈이 아니던가!
[넌 그 황금을 갖고 왔느냐?]
[제가 그렇게 어리숙해 보여요? 황금은 땅속에 잘 파묻어 뒀어요. 그건 저 만이 알고 있지요.]
노파는 히죽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 있다.]
거지소년은 신선호철각패를 받고는 하나의 종이를 노파에게 건네 주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수와 청양은 나이어린 소년의 행동에 잠시 얼이 빠져버렸다.
거지소년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x x x
시전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하나의 고찰(古刹).
거지소년은 그 사찰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사부님, 제자 다녀왔습니다.]
[콜록....... 수고 많았다. 초향(草香).......]
기침소리와 함께 들려온 여인의 음성이었다.
[사부님.......]
[괜찮다. 그래 미행은 당하지 않았겠지?]
[그럼요......!]
[콜록....... 콜록.......]
여인의 기침소리는 점점 더 심하게 들려왔다.
[사부님의 병세는 3년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선천적인 병이니 그 누굴 탓하겠느냐?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초향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3년전....... 누군가에 의해 외딴 산속에 짐승처럼 갖혀 지내던 나를 구해준 사람이 사부님인데....... 내가 어찌 모른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군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의 말투는 책을 안고 사는 서생들이나 읊조리는 것들이었다.
[그만해라! 3년동안 너의 그 군자지도(君子之道)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잖느냐! 도대체 네 놈의 정체는 나도 모르겠구나!]
[때가 되면 자연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린놈이....... 콜록...... 콜록......!]
석불(石佛)뒤에서 한명의 여인이 초췌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년으로부터 신선호철각패를 건네 받고는 그것을 소매에다 갈무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혹시나 해서 따라와 봤더니......! 역시 그대였군!]
청량한 음성이었다.
[......?!]
여인의 파리한 안색이 돌연 굳어지며 아미(蛾眉)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다름아닌 무당파의 대사형 청수였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여인의 음성은 무척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제자가 너무 똑똑해서 혹시나 했지. 중원제일의 신비일가(神秘一家)의 후손인 제갈여의(諸葛如意)! 당신이 뒤에 있지 않을까 하는.......]
그의 말에 제갈여의는 피식 웃었다.
[후훗, 역시 무당파의 대사형 답군요!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흐흠.......]
청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대를 처음 만난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을 생각하는 맘은 추호도 변함이 없어!]
[헛소리 말아요! 나는 죽어가고 있어요? 알아요? 우리 신비일가의 후손들은 저주 받은 집안이란 말이에요!]
여인의 부르짖음에 제자인 초향도 깜짝 놀랐다.
[여의.......]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콜록...... 콜록!]
청수가 그녀에게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서릿발같은 아미를 치켜뜨며 소리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당신....... 당신이 내게 준 상처가 얼마나 큰줄이나 알아요? 18세의 꿈으로 가득한 소녀의 가슴에 심어준 상처가 얼마나 고통 스러운줄 아느냐구요!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로 혼인도 할 수 없는 여자의 심정을 알기나 아느냐구요!]
[여의.......]
[당신은 내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죠? 신비일가의 저주받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여의....... 그래도 난.......]
[후훗, 이제와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나는 2년전부터 밤마다 홍등가(紅燈街)의 여인들처럼 사내들과 술을 마시며 몸을 팔았어요.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아리잖아요? 콜록...... 콜록!]
청수의 인상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강한 불신의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어! 내가 아는 제갈여의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여자가 아니야!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호호호......!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우리 신비일가의 여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죠?]
[.......]
청수는 잘 알고 있었다.
신비일가의 후손들은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는 천형(天刑)을 지니고 태어난다. 생명이 남들보다 짧은 대신 하늘은 그들에게 세상의 모든 만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해 주었던 것이었다.
만상제일뇌(萬象第一腦).......
그것이 그들이 지닌 무기이자 능력이었다.
허나, 그들은 30세가 다가오면 점점 체력이 약해지고 종래엔 몸의 모든 기능들이 하나같이 멈추어 버리는 끔찍한 천형에 걸려 있었다.
그들의 가주들은 대가 끊어지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이 태어나면 20을 넘기기 전에 출가를 다 시켰던 것이었다.
허나 문제는 여자쪽에 있었다.
여인들이 출가해 아이를 낳으면 그 이세도 어머니와 같은 천형에 시달려야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신비일가의 딸들을 며느리로 맏이하고픈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오갈데가 없어진 여인들이 갈 곳은.......
중이되어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길거리로 나와 몸을 파는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전락하는 것이 그들의 역사였다.
[콜록...... 콜록! 초향아, 그만 가자!]
그녀는 거지소년과 함께 고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청수는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스쳐지나가는 그녀를 말없이 보내고 있었다.
[아....... 하늘은 진정 무심하구나. 나의 첫 연정을 이렇게 만나게 해주었음에도 이토록 가슴아프게 만들다니.......]
x x x
초향은 말없이 제갈여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부님.......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
[.......]
그녀는 아무말도 없었다.
흐르는 눈물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 계속 |
| 리플률 :   0/3726 (코멘트수/조회수) - 0%
 |
   |
| 사랑해~<font color=red>♡</font> |
|
